11월 19일 업데이트됨

*이 글을 69번째 304낭독회에서 낭독되었습니다. 2014년 9월 광화문에서 시작된 304 낭독회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시민과 작가들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낭독회입니다. 낭독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관련링크 : https://304recital.tumblr.com/ )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신비. 이를테면 한기 서린 곳을 덥히는 작은 풀의 비밀이나 어린 시절의 꿈 같은 것. 마음이나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과 믿음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가치관과 삶의 목표를 결정해왔다. 머리가 굵어질 즈음엔 이 소중한 것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세상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문학선생님께 나의 생각을 말씀 드렸더니, 선생님은 세상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선생님의 말대로, 세상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들이 밤하늘의 빛점처럼 많았지만, 우리가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하는 크고 작은 비극도 그만큼이나 많았다.

그 해 4월, 나는 군대에 있었다. 모처럼 쉬는 날이었고 티비를 틀어둔 채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커다란 배가 침몰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소식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소식도 들었다. 자리에 앉아 뉴스를 보며 울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날 이후로도 나는 자주 울었고, 그래도 살아야 할 날들엔 작고 노란 리본이 대신 울어주기도 했으며, 무력하다고 느껴질 땐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울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날엔 울기를 거부하는 사람과 우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 함께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았다. 자식을 잃고 먹기를 거부하는 사람 앞에서 폭식하는 악마와, 우는 것도 우는 사람도 지긋지긋하니 그만 정리하자는 무감한 이웃들도 보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멈추지 않고, 모독과 무관심 속에 부숴진 존재들은 어딘가에서 무력하게 사라진다. 작고 여린 것들이 쉬이 잊혀지는 우리들의 쓸쓸한 시대. 하이데거는 시인의 사명이란 곧, 이 시대에 사라진 신적인 것의 자취를 찾고 그것이 머물 곳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자리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 땅이 간직한 기억들을 모아 오늘의 순간으로 이어주고, 시간이 남기는 변화를 기록할 공간을 준비하는 조경가[1]의 일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인의 사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건축 가운데서 오로지 묘와 기념비만이 예술에 속하며 일상에서 사용되는 모든 건축은 예술의 영역에서 쫓겨나야 한다고 말했다. 먼저 떠나 보낸 이를 묻고 온 곳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시적인 순간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의 반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유한하고 기억과 기억을 담은 사물들은 시간을 따라 점점 바래진다. 힘이 있는 자들은 여린 기억들을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기 위해 왜곡하고 편집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떠난 이들의 부재를 증명하는 기억의 공간은 조경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슬프고 따뜻하며 정의로운 약속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나라에 만들어진 기억의 공간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자리하기엔 너무도 차갑다. 설계자만이 이해하는 고상한 단어들로 구성된 기념비는 영혼이 전하는 말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으로 번역해주지 않으며, 공원 구석에 버려져[2] 오직 선거기간에만 정치인들로 북적 인다. 어떤 기억들은 그마저도 없으며, 기억되기를 거부당해 잊혀진다.[3] 비극은 끝날 리 없다. 멀리 떠난 혼들이 돌아와 상처를 씻고 남은 이들의 마음을 돌볼 수 있는 따뜻한 자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긍정할 수 있는 공간이 이 사회에 필요하다.

세상은 갈수록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사회의 낮은 곳에 있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다짐을 무력하게 한다. 살아있기에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우리는 매일 후회하고 반성하고, 쓰고 그릴 뿐이다. 그런다고 이 비극이 멈출 리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말처럼, 따뜻한 상상과 기억의 말들이 하나 둘 모여 우리가 서로 안의 아름다움을 긍정하고, 어두운 곳에 빠진 진실된 기억들이 세월을 넘어 기적처럼 떠오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세상에는, 우리 안에는 아직 아름다운 것들이 남아 있다.




[1] 조경(造景)하는 사람. (사)한국조경학회에서 제정한 한국조경헌장에서 정의하는 조경은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인문적‧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이다. [2] KAL기 참사 위령탑은 사건과 관계없는 양재시민의 숲에, 비극과 연결 짓기 어려운 추상적인 형태로 조성되어있다. 성수대교 참사 기념탑은 사람이 걸어서는 접근할 수 없는 교통섬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3]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자리엔 아파트가 세워졌다. 그 곳에는 참사를 기억하는 표지석 조차 없다.대구 지하철 참사를 기억하기 위한 시민안전테마파크 건립사업은 인근 주민들의 큰 반발을 샀다. 주민들은 희생자의 이름이 적힌 추모비는 ‘위락지구’인 팔공산자연공원과 어울리지 않다고 주장하며 추모행사가 일어날 잔디광장 조성 역시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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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LD

2020년 9월, 사무실 이전을 앞둔 어느 금요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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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spaciousness of uncertainty, there is room to act.


Note: 이 글은 <환경과 조경> 2020년 10월호에 [뉴노멀 시티스케이프] 기획으로 실렸다.


이해인


많은 사람이 코로나 이전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를 구분 짓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21세기 벨에포크를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으면, 우리 사회가 격동기를 지나고 있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주의의 환기를 넘어 사람을 질리게 하는 재난 알림 문자, 사려 없이 쏟아져 나오는 어설픈 코로나 극복 방법과 기회주의적 기획을 보고 있다 보면, 그것이 과연 위기감에 대한 성찰에서 온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코로나 이후 엄청나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소독제와 한강에 흩날리는 마스크 쓰레기를 보고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사회적 거리를 두게 하는 등 새로운 생활 규칙으로 자리 잡은 규범적 뉴노멀은 주변의 눈총 때문에라도 쉽게 따르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불편을 감수하며 미래 대책으로 삼을 본질적 뉴노멀은 고민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느낀다.

전염병과 환경위기의 시대에 요구되는 뉴 노멀에서 '노멀'은 ‘외부효과*가 대체로 내재해 있어서 형평성 있게 지속할 수 있는 균형 상태’ 또는 ‘그에 필요한 공간적 규범’으로 정의할 수 있다. 도시 공간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유난스러운 호들갑을 떨쳐내고 차분하게 떠올려보는 ‘대책으로서의 뉴노멀 시티스케이프’에는 몇 가지 필요한 점이 있다.


아주 가까운 미래에 상상하는 뉴노멀 시티스케이프에서

과시적 랜드마크는 누구의 안중에도 없다.

걷는 길이 아름답고 안전해서 탄소 발생 없이 이동과 탐험을 할 수 있고,

도시 경관을 위해 의미 모를 조형물이 필요하지 않으며,

지하주차장 확보라는 목표가 도시 공간의 큰 그림을 주도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불필요한 댐이나 보가 사라진 자연의 하천을 준비하고,

하천과 도시를 연결하는 엘리베이터가 물에 잠길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꾸준히 크고 작은 숲을 가꾸고,

도시 곳곳에 심은 나무가 수명을 다하기를 바란다.

식물애호가와 채식주의자에게 주목하고,

새나 벌의 생존권이나 선호를 등한시하지 않으며,

지속 가능성, 친환경성은 녹색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무늬만 친환경인 껍데기를 걷어낸다.

지극히 당연한데도 충분히 주창되거나 실현되지 못했던 이런 것들이 갑자기 일어나려면 우리가 하는 일에도 뉴노멀이 필요하다. ‘플랜을 잡는 것’은 이제 설계의 꽃이 아닐 수 있다. 도면상의 해법만 내놓을 게 아니라 사회 문제를 해결할 정치적 역량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실천적으로는 사회 현상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갖는 것, 그 태도에 맞는 삶을 사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혼자 독보적으로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조경 전문가의 집단 지식을 사회에 좀 더 쓸모 있는 방향으로 형성하고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천은 쉽다. 계속 공유하고 교류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어진 조건에서 길을 잘 찾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조경가의 전문성을 평가하는 시스템이나 조경 설계의 우수성, 당위성, 적합성을 심의하는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그 안에서 가장 수월한 탈출구만 찾지 말고, 조경의 발전을 옭아매는 낡은 시스템의 껍데기를 걷어내야 한다. 시도해볼 수 있는 실천은 '정상이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래 봐야 바뀌지 않는다는 말 따위는 흘려듣는 것'이다.


Hope locates itself in the premise that we don’t know what will happen, and in the spaciousness of uncertainty there is room to act.
희망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광범위한 불확실성 속에 우리가 행동할 여지가 있다.

Olafur Eliasson <In Real Life> Exhibition, Tate Modern 2019-2020 중에서





* 외부효과(externality)란 어떤 시장 참여자의 경제적 행위가 의도치 않거나 예상하지 못한 편익이나 손해를 가져다주는데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도, 지불하지도 않는 현상을 말한다. 크게는 경제 성장이 동반한 환경오염이나 양극화, 작게는 층간소음도 외부효과일 수 있는데 시장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가 사회적 협의가 필요하다. 만능은 아니겠지만, 외부효과만 내재화(internalize)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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