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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 식물을 얼마나 잘 알아야 할까

NOTE: laK 환경과 조경 2024년 2월호 '나의 식물에게' 기획의 일부로 실린 글을 다듬었다.


조경이 식물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조경에 식물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조경가가 다루는 공간이 자연을 배제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으레 자연의 한 요소로 식물을 다루게 되는 것일 텐데, 조경가를 식물전문가로 바라보는 시선이 종종 갑갑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식물을 다룬다는 점이 그래도 여러 공간설계 분야 중에서도 조경을 특별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기에, 나를 포함해 꽤 많은 조경가가 식물을 사실 잘 모른다는 점이 종종 불안하다.

식물에 대한 식견이 아주 부족한 사람으로서 ‘나의 식물’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니 식물 지식, 식재 설계에 대한 노하우를 감히 내놓을 재간은 없어 그저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몇 가지 식물에 대한 기억을 소소하게 써보려고 한다. 객관적이지 못하고 개인적인 선호가 드러나는 점은 양해를 구한다.


1. 찔레(Rosa multiflora)

찔레는 꽤 어렸을 때부터 정확히 이름을 알고 있던 식물이다. 원래 자연에 관심이 많아 농대에 가고 싶었다는 아버지는 관찰력이 좋아서, 과장된 기억이겠지만 운전하고 지나가면서도 ‘저기 대벌레 숨어있다’고 알려주셨던 것 같다.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는 이런 것도 먹었다고 알려주셔서, 찔레 껍질을 벗겨 그 속살을 먹어보기도 했다. 목으로 넘길 수는 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정도로 맛은 없다. 어쨌든, 먹어본 기억 탓에 이 식물은 꽃이 있어도 없어도 찔레인 것을 늘 알아봤다. 가시가 없는 민찔레도 있다. 탐조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새 관찰에 대한 열정을 불꽃처럼 일으키는 종’을 뜻하는 spark bird라는게 있는데, 나에게는 말하자면 이게 나의 spark plant다.


2. 쇠뜨기 (Equisetum arvense)

‘모두가 말리겠지만 써보고 싶은’ 식물이다. 뱀밥이라고 불리는 생식줄기가 올라올 때는 조금 징그럽게 생겼는데, 녹색의 영양줄기는 질감이 부드럽고 균일해서 들판에 쫙 펼쳐져 있을 때 햇빛을 받는 질감이 꽤 예쁘다. 어릴 때 지나다니면서 보이면 쉽게 끊어지는 게 재밌어서 뚝뚝 끊고 다녔던 풀, 너무 잘 퍼져서인지 대부분 잡초 취급을 받는다. 들판이라 쇠뜨기 심어보면 어떻겠냐, 제안해 본 적이 있는데 비웃음만 사고 끝났다. 검색해 보면 온통 어떻게 없애는지만 나온다.


주암댐 하류 보성강의 쇠뜨기 (뒤로 보이는 꽃은 흰제비꽃으로 추정). 한참 방류할 때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댐 하류의 평상시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댐으로 막힌 보성강도 자연하천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강이나 서울의 지천에서는 볼 수 없는 야생의 역동적인 흔적이 남아있다.


3. 붉나무 (Rhus chinensis)

이름처럼 단풍이 정말 빨갛다. 사실 붉나무를 한국에서 설계에 써 본 적은 없지만, 뉴욕 하이라인에 있는 사촌 격인 Rhus glabra (smooth sumac)의 특성을 좋아해 대체목으로 생각해 두고 있는 식물이다. 너무 붉어서 투명한 느낌이 날 정도로 짙은 단풍이 들기까지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거치기도 해서 가을 풍경을 다채롭게 해준다. 붉나무 색은 Rhus glabra만큼의 색이 안 날 수도 있겠지만, 정돈되지 않은 듯 거친 야생의 느낌이 드는 식물이 필요할 때 활용해 볼 계획이다.


갈색, 자주색, 선홍색, 다홍색, 주황색, 레몬색, 개나리색, 연두색, 풀색, 진녹색 등 여러 색이 있는데 유독 수맥의 단풍이 영롱하다. (뉴욕 하이라인)


4.수양버들 (Salix babylonica)

나는 탄천을 따라 자전거로 하천변만을 달려 출근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이다. 출근길 구간에도 이 수양버들이 커튼을 드리운 곳이 몇 군데 있다. 아침 해를 받아 투명해진 수양버들 커튼 뒤로 탄천에 꽂혀있는 한 배수구 끝 돌무더기에 앉은 민물가마우지를 찍는 게 일상이 되었다. 봄에 호흡기 질환을 일으킨다고 해서 점점 쓰기를 꺼리는 추세라 물가가 아니면 잘 안 보이긴 하지만, 간혹 도심 한가운데 엉뚱하게 있는 수양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크기가 좀 크다면 더운 지방의 후추나무(Schinus mole) 같은 느낌도 난다. 가로수나 정원수로 쓰이는 나무의 다양성이 워낙 적어서인지, 이런 엉뚱함이 도시 경관을 다채롭게 하는 것 같다.


배수로 끝에 돌 무더기가 있어 항상 민물가마우지가 여럿 앉아있다. 워낙 키가 커서 자전거로 지나갈 때는 그 키가 다 가늠이 안되는 높은 버드나무가 커튼을 드리우고 있어서, 가깝지만 먼 발치에서 바라보듯 조심히 보게 된다.


5. 뽕나무 (Morus alba)

발주처와 답사를 다닐 때만큼 질문이 두려울 때가 없다. “이 식물 이름이 뭐예요?”. 알면 다행인데, 모르면 대충 학명으로 속명만 말하거나 비슷한 영문 이름으로 얼버무리고 만다. 창피하지 않으려고 평소에 이름 모르는 식물을 보면 ‘모야모’ 앱에 열심히 물어본다. 내가 가장 여러번 같은 나무를 물어보고 또 물어봤던 것이 싸리나무와 뽕나무였다. 사실 뽕나무는 우리가 도시에서 흔히 보는 다른 나무랑 잎부터 꽤 다르게 생겼는데도, 이게 무슨 나무일까 궁금할 때 늘 머릿속에 후보로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오디가 열렸다가 그 주변이 다 질퍽하도록 떨어져 있으면 그제야 아 이 나무가 뽕나무였구나 하고 알아본다.

뽕나무는 광장에 심기에 좋지 않다. 아래에는 벤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6.양버즘나무 (Plantanus occidentalis L.) 또는 단풍버즘나무 (Platanus x acerifolia)

처음 도시설계 스튜디오를 들으면서 가로수를 골라야 하는데 도무지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 교수님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라며 추천해 준 London Plane이다. 플라타너스라고하면, 볼품없었던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운동장이 생각났다. 잎은 너무 크고, 떨어지면 부스러지는 큰 열매, 가끔 같이 떨어졌던 송충이도 싫고, 껍질도 막 벗겨져서 징그럽다고 생각했던 나무인데, Elizabeth Macdonald 교수는 수피와 봄의 잎 색이 밝아 도시 경관을 환하게 만드는 이 나무의 덕목을 칭찬했다.

사소한 대화였지만, 계획 내에서 식물을 생각할 때 내 개인의 단편적 지식이나 한 선입견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뉴욕 브라이언트 공원의 플라타너스를 먼저 만났다면 나 역시 플라타너스를 가장 좋아했을지 모른다.



나무에 대한 선호에도 어른 입맛 같은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지저분한 수피, 잘못 자란 것 같은 가지들, 마르거나 물든 잎이 섞여 있는 자연스러움이 멋스럽게 보인다. (뉴욕 브라이언트 공원)


7. 미국주엽나무 (Gleditsia triacanthos var. inermis)

Honey Locust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광장에 잘 어울린다. 원래 아까시나무처럼 가시가 무섭게 있는데 가시가 없는 품종이 주로 도시공간에 쓰인다. 공공공간에서 햇빛을 가리는 걸 좋아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나무가 있더라도 해가 적절히 들어오는 것을 더 선호하는 탓인지 작은 크기의 잎이 만들어내는 이 나무의 캐노피를 레이스 같다고 (lacey)하며 좋아한다.

우리나라 가을 단풍의 노란색은 주로 은행나무인데, 미국에서는 주로 주엽나무일 때가 많다. 은행나무 노랑보다 조금 더 맑은 색이다. 진녹의 사초 위에 떨어져 있는 잎 색의 대비가 멋있다. 잎의 느낌이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한 건 회화나무지만, 비슷한 용도로 쓰기는 쉽지 않다.


커야지만 멋있는 나무들도 있는데 미국주엽나무는 작아도 시각적인 임팩트가 크다. (미니애폴리스 Walker Art Center)


8. Coast live oak (Quercus agrifolia)

캘리포니아가 원산지인 상록 참나무로, 우리나라에는 없다. UC Berkeley 캠퍼스에서 Redwood (Sequoia sempervirens)와 함께 가장 흔히 보이는 아름드리나무인데, 특히 아래로 납작하고 넓게 드리우는 나무 그늘의 지름이 10~20미터씩 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교수회관 앞 Faculty Glade에는 아름답게 경사져 내려오는 잔디 언덕에 제일 큰 참나무 하나가 있다. 수관폭이 넓어 멀칭이 깔린 면적만도 어마어마하다. 생명다양성재단의 김산하 대표는 숲의 기본 단위를 정하는 기준을 ‘무언가 살기 시작한다면 숲’이라고 하기도 했으니, 이 정도면 나무 한 그루라도 숲이라 할 만하다.

Glade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Glade는 ‘나무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이라고 하는데,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특히 햇빛이 드는 그러한 공간을 지칭한다고 한다. 참나무의 견고한 그늘 옆이라 그런지, 구릉의 잔디가 유난히 밝고 쾌적하게 보인다.



9.유칼립투스, Tasmanian Blue Gum (Eucalyptus globulus)

조경 공부를 미국에서 시작하게 되어, 식물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보니 미국 이야기가 많아졌다. 잎이 늘어진 나무로는 대표적으로 유칼립투스가 있다. 원래 호주가 원산지인 이 나무는 캘리포니아 전역에 널리 퍼져있다. 호주와 캘리포니아 큰 산불의 원인이기도 하다.

80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여름 음악 축제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스턴그로브 공원(Stern Grove)은 유칼립투스 숲이 오목한 지형을 둘러싸고 있는 천연의 극장이다. 유칼립투스는 잎에 바람만 불어도 에센셜 오일에서 나는 듯한 싱그러운 풋내를 내는데, 와인 한잔에 공연을 보고 있으면 술과 나무향, 분위기에 절로 몽환이 느껴진다. 장미, 금목서, 히노키 등 매혹적인 식물이 많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짙은 안개가 깔아준 유칼립투스의 향이 숲에 빠져드는 듯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스턴그로브 여름 축제 중 샌프란시스코 발레단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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